정의로운 능력주의는 가능할까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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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2021
박중현
에디터
에디터의 노트

능력을 사회적 보상이나 가치 분배 기준으로서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을 순 없습니다. 건강한 공동체 운영을 위한 성장동력을 제공하며 정의의 한 축인 공정성과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능력에는 부나 문화적 배경과 같이 수많은 비능력적 요소가 작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마다 공평한 기회를 담보하기 어려우며 나아가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예 배제할 수도 방관할 수도 없는 능력주의 문제, 해결의 실타래는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까요?

배경

능력주의를 수정하기 위한 방향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와 함께 출현해 근대 사회의 구성원리로 작용했다는 점, 그리고 순수한 능력주의의 구현은 오히려 자본주의와 제로섬 관계에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분배의 공정성을 기회나 과정의 평등으로 구현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동일한 출발선'을 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과의 보정을 통해 지나친 불평등을 줄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소득에 따라 납부하는 세금액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절대적인 결과의 평등을 추구해서야 공산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며 공동체의 생산성도 하락합니다. 다만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어 능력주의라는 단일 필터를 고집하는 일의 불공정성문제, 한계를 인식한다면 다양한 분배 원칙과 가치 모델을 구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못한 때라면 불평등의 해소엔 분배의 보정이 필요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유의 보장에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입시 문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성적은 대학의 서열을 결정하며, 이는 사회에서의 소득에 영향을 미칩니다. 소득의 우위는 다양한 사회적 기회, 정치권력, 명예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아가 자식 세대로까지 연쇄적으로 이어지죠.

따라서 개인이 이를 거부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보상을 노리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합니다. 또 이러한 사고방식은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기에 모두들 낙오하지 않기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해 경쟁 상태에 내몰립니다. 결국 능력주의라는 획일화된 보상체계는 헤게모니로 정당화되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셈입니다. 자아실현의 다양성은 '욜로' '워라밸' '부캐'라는 표현처럼 개인 층위에 맡겨지죠.

이는 사회적 안전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회가 개인의 삶을 든든히 보장해준다면 과감하게 창의적인 일에 도전하며 실패에 두려워하지 않고 재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 레가툼연구소가 발표한 '2020 레가툼 번영지수' 및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사회의 질과 국민통합' 보고서(2015)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사회자본과 사회적 보호 역량은 각각 167개국 중 139위, 36개국 중 32위입니다. 사회자본은 사회적 관계와 제도에 관한 신뢰를 나타내며, 사회적 보호 역량은 복지 수준을 상징합니다. 기댈 곳 없는 각자도생의 환경에서 입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 거죠.

내용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제도적 접근

개인 차원의 대응은 문제 해결에 소구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정책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부와 권력의 집중을 막고 양극화 문제 해결에 기여할 제도적 접근들을 살펴봅니다.

조세를 통한 부와 기회의 순환
OECD 자료를 보면 한 가지 변함없는 원칙이 있다. 세금이 높은 국가일수록 빈부격차가 낮다는 것이다. — 도서 <능력주의는 허구다>, 스티븐 J. 맥나미·K. 밀러 주니어, 337쪽.

앞서 언급했듯 세금 제도는 사회적 재분배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세금이 높을수록 재분배율이 높죠. 소득이나 부에 따라 세율이 달라지는 누진세가 대표적입니다. 누진세는 소득이 높은 사람에게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응능과세원칙(ability-topay-principle)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렇기에 부의 배분에 직접 관여할 수 있죠. 특히 상속세의 경우 능력과 무관하게 축적된 부인 상속에 대한 세금인 데다, 세대가 바뀔 때 '판'을 새롭게 짜는 데 기여해 불평등한 출발점을 조정하는 의미가 있죠.

이렇게 징수한 세금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공 서비스 이용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교육, 의료, 취업 서비스 등을 제공해 부유층과 빈곤층 간 기회의 격차를 줄이고 좀 더 공평한 경쟁의 장을 만들 수 있죠. 출발선뿐 아니라 과정의 공정에도 기여하는 겁니다.

세금은 민감한 문제입니다. 지나칠 경우 사람들의 성공 욕구를 약화시키고 저축이나 투자 의욕도 꺾을 수 있죠. 투자는 낙수 효과를 통해 경기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생성하는 측면이 있고요.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비능력적 특혜를 통해 소득과 부를 지속적으로 늘리고 세습할 수 있는 경우 능력과 무관한 이익에 누진세를 적용하는 것은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됩니다.

시장으로부터 보호하는 재정 지출 정책

모든 근대 국가들은 혼합 경제(mixed economy) 체제를 취합니다. 시장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정부 결정에 의해 운영되는 부분도 상존하죠. 정부의 재정 지출은 의식적으로 시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떼어놓는 영역에 사용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공교육입니다.

공립학교는 영리를 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정부의 관리 아래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이익에 도움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필수적이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시민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지적 소양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시민이 주인이듯 모든 시민이 평등한 결정권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엘리트보다 의식 있는 대중이 사회 전체로 볼 때 가장 큰 이익이 됩니다. 민주주의의 발전과도 연결되죠.

게다가 교육은 능력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 되는 지출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회적 기회에 접근하려면 필요한 교육이 불공평하게 주어진다면 긍정적인 능력주의를 실현하기란 더욱 힘들기 때문이죠. 교육의 평등에 있어 자율형사립고 문제가 계속해서 도마에 오르내리는 이유기도 합니다. 현재로선 그리기 힘든 미래지만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공립학교가 사립학교만큼 좋아지면 교육이라는 기회의 공평성 문제는 해결될 수 있죠.

교육 외에도 사회 기반 시설 및 의료 서비스 지원 등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재정 지출입니다. 생존, 안전과 같은 기초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자아실현과 같은 상위 욕구를 발휘할 수 없다는 매슬로 욕구 이론이 나타내듯 저소득층의 가용 자원을 아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재력의 발전은커녕 생존을 위해 가뜩이나 부족한 여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죠.

차별을 막기 위한 조처

차별은 성별, 계급, 인종, 국적, 나이, 장애, 질병 등 비능력적 요인에 따라 불평등을 유발합니다. 그러므로 기회의 평등을 위해선 이에 따라 누구도 기회와 평가에 있어 배제 받지 않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선 차별 행위에 대해 법적 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사후 제재를 넘어 미래의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고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관행을 도입하는 것이 목표로 꼽힙니다.

이외에도 입학이나 채용 절차를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것도 차별을 막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발의 투명성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정하게 기회를 부여받지 못해 온 취약 집단에 대해 할당제와 같이 보완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 역시 같은 흐름입니다.

할당제라고 해서 능력 없는 사람을 뽑자는 게 아닙니다. 사회적 차별이나 구조 불평등에 의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능력 있는 사람 뽑자는 것이죠. 이는 집단의 다양성을 키워 더 나은 성과를 내는 데도 기여합니다. 물론 할당제를 포함해 차별을 막기 위한 모든 조처가 필요 없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입니다. 언젠가 폐지를 목표로 해야 하지만 사회의 공정성을 실현하는 복지로서 현재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의미

일의 존엄성과 겸손의 필요성

지난 화에서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저자 마이클 샌델이 내세운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을 일부 거론한 바 있습니다. 그 중 '능력주의적 서열에서 벗어나 일의 존엄성 인식하기' '성공과 능력에 깃든 운적 요소를 인지한 겸손'을 여기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앞서 간략히 살펴본 정책 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있습니다. 권력자 및 사회 지도층의 의지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일의 존엄성과 능력에 깃든 운(비능력)적 요소를 인지한 겸손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위 정책들은 그간 존엄을 인정받지 못했던 계층을 위한 것이거나 특정 성공에 기여했음에도 소외된 주변에 돌아가는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일의 존엄성
언젠가 우리 사회는 청소 노동자들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말이죠. 따져 보면 우리가 버린 쓰레기를 줍는 사람은 의사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가 그 일을 하지 않느다면 질병이 창궐할 테니까요. 모든 노동은 존엄합니다. — 마틴 루터 킹(도서 <공정하다는 착각>, 325쪽.)

일의 존엄성을 환기하는 일은 인간과 일의 가치를 환기하는 일입니다. 능력주의는 분배적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지만, 정의는 분배의 문제만 있지 않습니다. 올바름의 문제도 중요합니다. 오로지 성과와 능력에 따라 일의 가치가 평가된다면 여기에 부합하지 않는 이는 무시받아 마땅한 불행이 정당화됩니다. 이러한 사회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늙거나 병들고 장애를 얻어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지의 베일' 상태에서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롤스의 정의론과도 부합합니다.

급여에 따른 일과 능력의 평가는 사회적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주지 못하는 점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과대하게 어떤 경우에는 과소하게 평가됩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부유한 카지노 왕의 사회적 기여가 소아과 의사보다 정말 1천 배나 가치 있는지 묻죠. 시장 사회에서 '능력에 따른 몫을 받는다'는 능력주의적 맹신은 진정한 가치 비교의 눈을 흐리게 합니다.

겸손의 태도

일의 존엄에 임금과 소득만 있는 게 아니듯 성공 역시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능력과 성공에는 수많은 우연과 비능력적 요소가 작용합니다. 겸손은 이를 인지하는 통찰입니다. '우연성'이나 '비능력적 요소'가 국내에서 주로 '운'으로 통틀어 번역되기에 '겸손'이 다소 도덕적 성찰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지만, 엄밀히 말해선 성공에 깃든 능력 외적 요소를 인지하는 통찰입니다.

능력의 우연성에 대해 인식하고 성공에 있어 수많은 사회·문화적 요소가 작용했음을 인지해야만 스스로의 특권을 과도하게 정당화하는 심리에서 벗어나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겸손은 연대를 끊는 가혹한 능력주의의 홍역을 극복하고 더 관대한 공적 삶을 실현하는 토대가 됩니다.

키워드

복합 평등(complex equality)으로서의 정의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중대한 문제는 돈의 불평등한 분배만이 아니라 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어 다른 것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마이클 왈처, 1999년 10월 내한 당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회적 분배의 다원론을 실현하는 정의론으로는 마이클 왈처의 복합평등론이 있습니다. 그는 롤스처럼 분배가 사회정의 실현에 중요하다는 점은 동의했지만, 개인들의 고유한 상황을 무시한 가상적 상황에서 평등의 필요성을 역설한 롤스의 정의론을 현실성 없는 추상적 정의라 비판했습니다. 왈처는 사회마다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며 그 가치마다 고유한 영역이 있으므로 서로 다른 영역의 가치는 서로 다른 기준에 의해 분배돼야 한다고 봤죠. 이를테면 경제 영역에 속하는 부가 정치 영역에 속하는 권력에 영향을 주면 안 되는 것처럼요.

그는 이를 '독점'과 '지배'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왈처는 독점은 용인하되 지배는 막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독점이란 한 영역의 가치를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며, 지배는 다른 영역의 가치까지 잠식하는 일입니다. 예로 들었던 부의 독점의 경우 자유 교환 능력의 우위를 통한 불평등이기에 인정하지만, 경제적 능력이 공직이나 권력의 획득 등 다른 영역에까지 지배로 나아가면 사회적 불이익을 야기하는 부정의로 판단합니다.

이는 사회적 가치를 절대적으로 평등하게 분배하지 않고 각각 영역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평등주의적 가치를 구현할 기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죠. 독점과 지배 개념을 통해 정부 개입 적정선에 대해서도 기준을 드러낸 셈이고요. 능력주의의 대안에 있어서도 능력주의가 작동하는 분야를 구분해 정경유착과 같은 폐해를 방지하고, 영역마다 능력이 아닌 다양한 기준을 특수성에 맞게 마련할 사고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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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자료

도서

<고등학교 통합사회 교과서>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능력주의와 불평등>, 박권일 외 9명 지음, 교육공동체벗, 2020.

<능력주의는 허구다>, 스티븐 J. 맥나미·K. 밀러 주니어 지음, 김현정 옮김, 사이,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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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능력주의(meritocracy)를 넘어서: 능력주의의 한계와 대안", 박효민,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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