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환경 문제에 필요한 '진짜' 태도

환경 문제의 세대교체: '인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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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021
박중현
에디터
에디터의 노트

분야를 막론하고 환경 문제를 다뤘을 때 결국 지지를 받고야 마는 의견이 있죠. '역시 인간이 문제야...' 자조적인 성찰이긴 하지만, 흘려듣기 힘듭니다. 실제로 지구상에 환경오염 문제를 낳는 주체는 인간이며 이를 제지하거나 개선할 가능성을 그려보는 일도 쉽지 않으니까요. 사실 환경오염은 굉장히 희한한 개념일 수도 있죠. 외계인이 있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야,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스스로 자기 환경을 망치는 습성이 있군!"

지구는 '인류의 시대'

오늘날 지구 시스템과 환경 문제를 이야기할 때 자주 쓰이는 용어가 있다. 바로 '인류세'(Anthropocene)다. 이는 노벨상 수상자인 네덜란드 대기 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2000년 국제환경회의에서 현 지질연대를 바꿔 부르자며 제안한 말이다. 지구의 나이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지질연대는 크게 대(Era), 기(Period), 세(Epoch), 절(Age)로 나뉜다. 현재 국제 지질학연합(IUGS)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지질연대는 아직 홀로세(Holocene)다. 한 세가 이동하는 데는 수백에서 수천만 년까지 걸리며, 홀로세가 시작된 지는 현재 약 1만200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연대명이 뜨거운 호응을 얻는 이유는 크뤼천이 제안 당시 가졌던 문제의식과 같다. 이미 지구 시스템은 홀로세와 다른 시기를 맞이했으며, 그 이유는 인류의 영향 탓이라는 것이다.

인류세는 그리스어로 '인류'를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에 '최근의 시간'을 나타내는 지질학적 시대 구분 용어 '-세'(-cene)를 결합한 말이다. 쉽게 '인류의 시대'로도 표현할 수 있을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지구 시스템이 인류의 영향 아래 놓였다는 현실 인식이다. 바꿔 말하자면 인류가 끼친 영향이 그간 지질연대 구분의 기준이 됐던 소행성 충돌이나 화산 폭발, 빙하기와 맞먹을 정도로 크다는 얘기다. 그 시간을 비교하면 오히려 수백, 수천 분의 1에 불과하다.

지구의 나이로 볼 때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홀로세와 인류가 지구를 장악한 인류세가 차지하는 시간을 비유한 그림. 실제 산술적으로 비교하면 각각 선 하나, 점 하나의 시간도 차지하지 못한다.
인류세의 기점은 언제일까?

인류세의 시작점을 언제로 볼 것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시기마다 인류가 지구에 끼친 영향이 명료하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전통적인 인류 문명사 관점에서 볼 때 각 시기가 인류 발달의 '티핑포인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크게 네 가지 기점이 있다.

첫 번째는 농경의 시작으로, 시기상 1만2000년 전까지 거슬러 오를 수 있다. 인류의 농경과 산림 벌채로 다양한 생물이 멸종하고 생지구화학적 순환 과정이 바뀌는 등 지구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왔기에 인류의 농경을 인류세의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다. 두 번째는 15세기 후반 흔히 '콜럼버스 교환'으로 불리는 대륙 간 이동이다. 유럽인이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 제도에 도착하고 서구 문명이 급속도로 팽창하며 인간과 함께 여러 동식물이 이동, 생물종 변화가 활발했던 시기다. 세 번째는 산업혁명이 시작한 18세기를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보는 시각이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화석연료 사용량이 증가하면서 탄소 배출량이 급증했고, 이로 인해 지구 시스템이 결정적으로 변화했다는 분석이다. 마지막으로는 세계 2차대전 이후 자본주의 산업화와 인구폭발 등이 급격히 이루어진 '대가속'(the Great Acceleration) 시기가 직접적인 인류세의 시발점이라는 주장이 있다. 플라스틱, 콘크리트 등 인류에 의해 생성된 폐기물인 '기술화석'(technofossil)이 발생했으며, 당시 벌인 핵실험이 초래한 낙진이 인공 방사성 물질을 토해내며 지구 토양 성분을 변화시켰다는 게 근거다. 지구에 직접적인 큰 영향을 끼치는 힘을 드러냈다는 점도 상징적이다.

우리는 그동안 '환경'을 제대로 보고 있었을까?

'인류세'가 호명되기 전에도 환경보호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고 환경오염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역시 지적돼왔다. 이대로라면 결국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래서인지 문학이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에서 디스토피아의 단골 원흉으로 환경오염이 그려지기도 한다. 한술 더 떠 지구를 '구원'하고자 어떤 식으로든 '인류 청소'가 시도되는 상황마저 친숙하다. '말도 안 돼!'라며 개연성에 딴지 거는 이는 드물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오면 환경 문제에 대한 인간의 몰입도는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일어날 개연성에도 공감하면서 그 문제를 개선하지 않은 미래를 그리는 데 친숙하다. 남 얘기이거나, 그래도 되는 것처럼. 마치 나심 탈레브의 '흑조 이론'처럼 환경오염으로 초래될 수 있는 거대한 재앙에 대해서는 막연히 불확실한 사건으로 우려하면서도 이를 부를 확실한 '전조'인 인간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뚜렷이 인지하지 못한다. 환경 문제에 대한 이러한 '몰입 저하'를 환기하는 몇 가지 잘못된 믿음이 있다.

첫 번째,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지구의 상태를 눈에 띄게 호전시키거나 환경오염을 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낙관이다. 그러나 '녹색 지구를 만들어요' 같은 제안은 오늘날 그대로 실행하기 힘들다. 이미 못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기술이라는 조력자를 업고 아직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무슨 재간을 부린들 돌아오지 못하는 것들도 많다. 지금 지구는 20세기 100년 동안 500종 이상의 육지 척추동물이 사라졌다는 '여섯번 째 대멸종'을 겪고 있다. 비슷한 수의 종들이 또 멸종할 것으로 내다보는 기간은 보다 짧은 향후 20년 동안이다.

뒤로 물러나 모든 것을 혼란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자 희망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우리가 지구 시스템에 초래한 혼란 중 일부는 현재 되돌릴 수 없으며, 그로 인한 영향은 수천 년간 지속될 것이다. — 도서 <인류세>, 클라이브 해밀턴, 90쪽.

두 번째, 엄밀히 말해 오늘날 진정한 의미의 '자연'이나 '야생'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인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많은 과학자나 환경학자들이 오늘날 환경 문제에 필요한 접근방식을 거론할 때 환기하는 이야기다. 재임스 매키넌의 자연환경 에세이 <잃어버린 야생을 찾아서> 역시 이러한 관점을 잘 표현한다. 소위 '자연을 느끼러 간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숲이나 정원, 심지어 식물이 많은 테마 카페로 향한다. 가서 '음, 자연의 맛이야'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농촌이나 바다, 산으로 향한들 이들 모두 정도나 의도의 차이일 뿐 모두 인간의 손길이 닿은 산물이다. 사실상 인간이 닿지 않은 '순수한' 자연은 현재 지구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인간의 갈망이나 희망, 또는 로망을 담은 '관념어'가 돼버린 게 아닐까?

'자연'일까?

도서 <휴먼에이지>의 저자 다이앤 애커먼 역시 비슷한 점을 지적한다. 그것이 "계획이든 실수이든 모든 지구 시스템은 인간과 얽혀 있으므로" 자연이나 야생이라기보다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만든 세상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 보호'나 '생태계의 균형을 맞춘다'는 전통적 관념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보호하는 '자연'은 언제나 생태계 또는 지구 시스템 전체를 가리키지 않았다. 보호는 선택적이었다. 어떤 동물은 '유해'하므로 죽고, 어딘가의 숲이나 습지는 '개발'을 위해 없어진다. 인간이 맞추려는 '생태계의 균형'의 중심에 있는 것은 언제나 인류였다.

똑똑! '인간이 사라진 지구'에 대해 논픽션으로 접하고 싶다면 앨런 와이즈먼의 책 <인간 없는 세상>을 추천해요.

인류세의 진정한 의미

지구는 현재 인간의 행성이다. 우리는 숲을 그대로 둘지 베어낼지, 판다가 생존할지 멸종할지, 강이 어디로 어떻게 흐를지는 물론 대기의 온도까지 결정한다. ... 이런 시대는 여태껏 없었다. — 도서 <인류세의 모험>, 가이아 빈스, 14쪽.

2019년 5월21일 인류세에 대한 지질학계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발표에 앞서 인류세실무그룹은 두 가지를 표결에 부쳤다. '인류세가 지질학·층서학적으로 실재하는가?' '1950년대를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는가?' 두 안건 모두 위원 34명 중 29명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인류세실무그룹은 인류세를 정식 지질시대로 인정하자는 내용의 제안서를 2021년까지 국제층서위원회에 전달하기로 결의했다. 이 제안서가 국제층서위원회와 국제지질학연합에서 통과되면 인류세가 공식화된다. 인류의 이름이 지질연대표에 새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 구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다. 인류세는 지질연대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는 점에 있다. 인류세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인 클라이브 해밀턴은 "지구 시스템 기능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력이 자연의 거대한 힘들과 겨룰 정도가 되었다"는 말로 인류세의 의의를 설명한다.* 그 반대편에는 문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신봉하는 에코모더니스트(ecomodernist)들처럼 인류세를 '인류가 주인공인 시대'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그들은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태양광을 차단하는 에어로졸을 대기중에 살포해 온도를 낮추는 식으로 기술적 해결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류세'가 인간의 막강한 영향력에 뿌듯하라고 등장한 이름은 아니다. 오히려 이대로 가다간 인류 손에 지구 시스템이 결딴날 수 있다는 경고 문구에 가깝다.

문제는 인간중심주의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충분히 인간중심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도서 <인류세>, 클라이브 해밀턴, 78쪽.

클라이브 해밀턴은 이를 위해 필요한 인간의 태도로 '신인간중심주의'를 주창한다. 이는 앞서 짚었던 '인류세' 개념의 출현 배경 및 의미와도 연결된다. 인간이 지닌 힘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자연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아는 것이 환경과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신인간중심주의적 태도다. 이는 자연환경을 필요에 따라 이용가능한 자원으로 보는 기존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난다. 기존 인간중심적 사고에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끼치는 영향과 그로 인해 자연환경이 인간에 가할 수 있는 제한 모두 염두에 없다. 주인의식 없이 쓰기만 할 뿐이다. 이에 반해 인간이 자연환경에 초래할 영향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며 행동하는 것이 그가 이야기하는 새로운 인간중심주의적 태도다.

환경 문제를 보는 눈은 어때야 할까?

'잘못된 믿음' 이야기나 해밀턴의 주장을 빌린 것이 단지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는 아니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실질적으로 환경을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는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서다. 이미 인간중심적인 관점에 물들어 관성이 생겨버린 '생태계' '자연' '환경'이라는 말로는 문제 해결에 필요한 진짜 환경을 파악할 수 없다. 이는 오늘날 과학자들이 환경 문제를 파악하고 대처하는 틀로써 '지구 시스템 과학'(earth system science)을 내세우는 이유기도 하다. 즉 '인류세'는 현재 직면한 지구 시스템의 위기와 인류의 책임을 건드리기도 하지만, 문제를 실증적이고도 통합적으로 사고할 창에 대한 개념을 부여해준다.

* <인류세>, 클라이브 해밀턴, 이상북스, 2018, 6쪽.

환경과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인간의 자세

지구는 인간과 관계 맺고 있는 유기체다

'인류세'가 출현한 이유를 함축해 설명하면, 인류의 활동이 지구 시스템의 '항상성'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지구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 지구 시스템의 항상성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개념은 1972년 제임스 러브록이 제시한 가이아(Gaia) 이론이다. 지구 전체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고, 지구 시스템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및 생명체들의 상호관계에 주목했다. 그러나 러브록의 가이아 이론은 당시 충분한 근거 없이 과학의 영역에 신화를 끌어왔다는 비난을 받으며 무시당했다. 하지만 지구 전체를 물리, 화학, 생물학적 구성 요소로 파악하고 그 안의 자기조절 시스템에 주목하는 지구 시스템 과학이 발전한 오늘날 러브록의 이론을 무시하는 이는 없다.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 교수는 인류세라는 시대에 인간과 과학기술이 가이아의 자기조절 능력에 생태환경 변화 감시 및 자기인식 능력을 더할 수 있게 됐다는 '가이아 2.0' 이론을 내놓기도 했다. 이를 통해 생물과 환경의 상호작용 및 지구의 자기조절 상황을 봤을 때, 그 연결망인 생물종 다양성이 깨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치 러브록이 지구를 두고 '가이아'라는 유기체를 떠올렸듯 지구 시스템을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 역시 유기적 움직임을 보일 필요가 있다.

현대인들은 거품 속에서 자연을 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국에서 청소년 세 명 가운데 하나는 달걀이 닭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고, 치즈를 식물에서 얻는다고 믿으며, 우유가 젖소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모른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음식이 나오는 곳은 다름 아닌 슈퍼마켓이다. — 도서 <리얼리티 버블>, 지야 통, 16쪽.

환경 문제를 지구 시스템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단지 인간 개인의 이기심이나 몰이해 때문은 아니다. 인류에게 환경이란 결국 인간을 주체로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다. 좁게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리적 상황의 결합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러한 프레임에서 벗어나 자연과 환경을 이해한다는 건 상당한 사고력과 감수성을 수반하는 행위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에 발휘하는 영향은 단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대기오염은 지구의 온도를 높여 빙하를 녹이고 쓰나미로 돌아오는가 하면,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는 먼 대양을 건너 바다거북의 내장에서 한글 상표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영향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그 수준의 심각성과 (나쁜 의미에서) 유기적 관계 맺음이 눈에 띄게 가시화된 것이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인류세의 지구다. 이를 이해하고 행동을 조절하는 일이 인류세의 지구 시스템을 인식한 인류의 자세다.

환경은 더이상 인류의 병풍이 아니다
'지속가능한 발전'에 있어 전통적 관계는 경제, 사회, 환경의 상호보완이었다면, 이제는 환경의 울타리 안에서 가능한 발전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오늘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자는 것은 도덕적 제언이 아니다.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 위원장 브룬트란트가 주도적으로 처음 사용한 '지속가능한 발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미래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능력에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 다시 말해 미래 세대를 위한 환경보전도 고려하지만,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해야 할 필요도 대등히 강조된다. 이처럼 전통적 의미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은 경제, 사회, 환경에 대한 고려를 상호밀접하게 동시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관계는 바뀌고 있다. 현재 지구 시스템이 보여주는 상태와 인간 사회 및 기술의 상태를 저울질해 한계를 고려할 때 이대로 어림없다는 게 근거다. 이에 오늘날 지속가능한 발전은 환경을 최우선으로 두고 그 안에서 가능한 방안을 강구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삶의 프레임을 바꾸지 않으면 생태적 지속 가능성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계산이다. 과학기술이 그 '용량'을 다소나마 늘려주더라도 말이다.

인류세는 사고와 행동의 프레임을 개인이 아닌 인류 차원에 둘 것을 요구한다. 그 준거의 틀이 되는 것은 물론 지구 시스템이다. 인도의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인류세에 들어서 더이상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가 구분하기 어려운 지점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모두 같은 '지구역사'(geohistory)로 엮이게 됐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근대에 주목한 것은 경제 성장과 자유의 성취지만, 이는 모두 화석연료로 대표되는 에너지 사용으로 거둔 결과다. 사회·정치 제도 역시 지구 시스템의 물적 지원과 기반 아래 마련했다는 점에서 인간은 줄곧 지구 시스템의 품 안에서 살아왔으며, 이후에도 그럴 수밖에 없음을 환기한다.

인류의 삶을 실질적으로 꾸리는 분야에서도 환경과의 융합이 필수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 2019년 12월 카이스트 인류세 연구센터가 개최한 '국제 인류세 심포지엄'에서는 인류세 해결을 위한 다양한 학문의 융합 필요성을 논의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정치는 인류세 가속을 멈추거나 늦추기 위해 입법, 제도 개선, 투자 등을 논의해 적용해야 하며, 재계는 성장 일변도의 자본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환경중심사고'로의 전환이 가져올 이해타산에 대해 눈 뜰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인류세를 헤쳐나가는 담론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더는 인류가 거품 낀 눈으로 환경 문제를 보지 않도록 길잡이가 돼줄 수 있다.

시작은 눈을 뜨는 일이다. 환경에 대한 주체성을 찾고 지구 곳곳에 벌어지는 상황을 보는 일. 나의 영향을 가늠하고 가능한 실천을 떠올려보는 일. 평소 지나친 누군가의 호소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일. 인류세를 살아가는데 있어 인류는 지구 시스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조각이다.

누구도 기후변화에 대해 얘기하지 않아요.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게 우리의 존재를 위협할 정도로 나쁜 거라면서 어째서 우리는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거죠? 왜 어떤 규제도 없나요? 왜 불법으로 만들지 않나요? ... 모두들 기후변화가 존재론적 위협이며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살고 있어요. 저로선 이해가 안 갑니다. 왜냐면 탄소배출을 멈춰야만 한다면 탄소배출을 중단해야 합니다. 제게는 흑백의 문제입니다. 생존에 있어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 그레타 툰베리, 2018년 11월 TED 연설 일부

💡 다음은 인류세가 도래하기까지 인간이 지구에 남긴 대표적인 흔적을 돌아보는 '인류세의 황금못을 찾아서'가 이어집니다.

참고한 자료

도서

<기후 변화와 환경의 미래>, 이승은·고문현 지음, 21세기북스, 2019.

<리얼리티 버블>, 지야 통 지음, 장호연 옮김, 코쿤북스, 2021.

<사피엔스가 장악한 행성>, 사이먼 L. 루이스·마크 A. 매슬린 지음, 김아린 옮김, 세종서적, 2020.

<인류세>, 최평순·다큐프라임 <인류세> 제작팀 지음, 해나무, 2020.

<인류세>, 클라이브 해밀턴 지음, 정서진 옮김, 이상북스, 2018.

<인류세의 모험>, 가이아 빈스 지음, 김명주 옮김, 곰출판, 2018.

<잃어버린 야생을 찾아서>, 제임스 매키넌 지음, 윤미연 옮김, 한길사, 2016.

<휴먼 에이지>, 다이앤 애커먼 지음, 김명남 옮김, 문학동네, 2017.

논문

"인류세(Anthropocene)의 시점과 의미" 김지성외 2명 지음

뉴스

사이언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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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자연을 과도하게 착취해왔다"

‘홀로세’ 가고 ‘인류세’ 올까

“현재 지구에서는 6번째 대멸종 진행 중…속도 더 빨라졌다”

중앙일보

미쳐버린 전세계 기후···히말라야 빙하 홍수로 200명 몰살

카이스트신문

인간이 만들어낸 지질시대: 인류세 도입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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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 2.0’…인간 자각 없인 지구시스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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