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궈왔던 리얼돌에 관한 판결이 또 하나 나왔다. 법원은 리얼돌이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볼 수는 없다'며 음란물이 아니라 성기구라고 판단했고, 따라서 김포공항 세관의 수입 보류 처분을 취소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2019년에 인천공항 세관을 대상으로 리얼돌 수입업체가 낸 소송에 대해 수입 적합 판정을 내린 대법원의 판결과 일관적이다. 현재 리얼돌과 관련한 법률은 관세법이 유일하며, 몇 년 전부터 제기돼왔던 다양한 악용 가능성이나 아동 형상의 리얼돌에 대한 규제는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다른 한편 '사적 공간에서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이라는 이유로 수입 적합 판정을 내린 대법원의 논리와는 다르게, 리얼돌은 지난 몇 년간 공적 공간에 계속해서 출현했다. 국정감사장에 나타나는가 하면, 지난해 12월에 열린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 전시에 리얼돌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기도 하다. 잊을만하면 계속 뉴스에 신문에 출현하는 리얼돌. 코로나로 특수를 맞은데다 AI기술의 발전으로 앞으로 섹스로봇 논쟁으로 이어질 전망인 리얼돌 논쟁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성기구는 Okay: 1월 25일 서울행정법원은 성인용 전신인형('리얼돌')이 '풍속을 해친다'며 수입통관을 보류한 김포공항 세관장의 처분을 취소하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의 핵심은 리얼돌이 '음란물이 아니라 성기구'라는 것. 해당 리얼돌이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왜곡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적 부위나 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라 볼 순 없다"며 음란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사적인 공간에서 사용되는 성기구의 성격상 "은밀한 영역에서의 개인 활동에는 국가가 되도록 간섭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Where is 입법부? 법원의 판결이 주목되는 이유 중 하나는, 현재 리얼돌에 대한 국내 규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수입되는 리얼돌의 통관에 관한 법률이 있을 뿐, 국내에서 생산·유통·소비되는 리얼돌 자체에 대해서나, 86곳이라고 알려진 리얼돌 '체험방'에 대한 규제가 없는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리얼돌을 아동ㆍ청소년 형태로 만든다거나, 연예인이나 지인을 본따 주문해 생산할 가능성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초상권, 인격권 등을 이유로 민사상 소송사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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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리얼돌은 사법과 입법의 영역을 넘어 예술에서도 논란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2020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른 시각예술가이자 영화감독인 정윤석의 전시작 다큐멘터리 '내일'은 리얼돌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일각에서 여성혐오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 전시는 지난해 12월4월에 개막했다가 코로나19 방역을 목적으로 폐쇄되었고 1월19일부터 전시가 재개됐다.
코로나 특수: 코로나19로 인해 작년 세계 각지에서 섹스토이뿐만 아니라 성인용 리얼돌 판매가 급증했다. 지난 7월22일에 중국의 온라인 매체에 의해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알리바바의 글로벌 소매 플랫폼 알리익스프레스의 성인제품 수출은 2019년에 비해 50%, 리얼돌의 경우 100%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주문이 5배 늘었다. 스페인과 독일에서의 주문량도 크게 늘었다. 중국산 성인 제품은 세계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깊은 수치다.
사람을 만나는 횟수가 줄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는 코로나 시대, 리얼돌은 그 무엇보다도 논쟁적인 방식으로 '인간이 타자(또는 사물)를 만나는 자세'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천의 경우: 2017년 5월, 성인용품업체 A는 리얼돌 통관을 보류한 인천세관의 처분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3심 끝에 대법원은 리얼돌이 풍속을 해치지 않는 성기구라는 이유로 업체의 손을 들어줬다.
김포의 사례: 성인용품업체 B가 2020년 1월에 김포공항 세관의 리얼돌 수입 보류 조치 취소를 요청하며 소송을 냈고, 2021년 1월25일에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재판장 박양준)은 "리얼돌은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볼 수 없어 풍속을 해치는 물품이 아니다"는 A사 측 주장을 받아들여 김포공항 세관장의 처분을 취소하고, 소송 비용은 세관이 부담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소송은 계속된다: 관세청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할 방침이다. 한 관계자는 계속되는 사법부의 '리얼돌은 성기구' 판단에 대해 "풍속 저해 물품이라고 보고" 있으며 "다만 법원 판결을 무시할 순 없기 때문에 법무부 등 관계부처와 함께 리얼돌을 어느 선까지 수용할 수 있는지 보완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리얼돌을 둘러싼 사회의 뜨거운 논쟁과 리얼돌이 아동·청소년이나 특정인을 본떠 생산되거나 유통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법안은 아직 없다. 음란물의 수입을 막는 법률과 판결만 있을 뿐이다.
리얼돌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될 예정이다. 사법부의 판단에 관세청이 항소할 예정인 데다가, 국내에서 리얼돌 '체험방'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오용될 수 있는 문제를 규제하는 법안 정비 속도가 너무 늦다는 점은 그 이유 중 하나다. 추후에 법을 통해 리얼돌이 허용되거나 금지되더라도 판매자, 사용자, 여성계 등의 견해가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에 논쟁이 쉽게 사그라들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리얼돌에 찬성하는 이들은 리얼돌은 인간과 명확히 구분이 가능하며 의지나 감정 등의 능력을 갖추지 않은 도구일 뿐이라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리얼돌에 대한 반대 입장, 특히 여성계의 반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계속해서 일어난 사건·사고와 이에 제기된 성평등과 관련한 문제제기는 많은 이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에 대한 분노와 공포를 넘어 무력감까지 느끼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 전신과 흡사한 크기, 형태, 특징을 가진 것이 리얼돌이 다른 섹스토이와 구분되는 점이다. 반대 의견을 충분히 숙고해야 하겠지만, '반려인형'으로서의 기능 및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여성 신체의 대상화라는 문제제기를 함께 고심하되 미래의 (여성형, 그리고 남성형의) 리얼돌을 어떻게 성평등하게 설계하면서도 인간의 성적 자유와 실험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경험 자료 부족: 국내외의 리얼돌 논쟁이 가지는 특징은, 양측이 제기하는 주장이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생산 단계에서 리얼돌의 성적 대상화 문제에 대한 지적은 유의미한 것이지만, 리얼돌 사용에 대한 경험적 자료가 희귀하기 때문에 범죄와의 연관성이나 공격적인 성관념 고착화 등에 대한 주장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실제로 온라인 리얼돌 사용자 포럼 사용자를 대상으로 이뤄진 해외 연구에서는 57%의 사용자가 리얼돌과의 관계를 "우애(companionship)"와 가까운 것이라고 답했다. 얼마나 많은 사회 약자들이 리얼돌을 통해 편익을 얻었는지도 경험적 증빙이 필요한 영역이다.
형상보다 기능에 집중하여 설계해야: 한 논자는 초기 단계의 리얼돌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을 충분히 숙고하되, 미래의 리얼돌, 그리고 나아가서 섹스로봇이 설계되고 생산되는 과정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리얼돌이 인간의 형상보다는 기능에 집중해 설계돼 만족감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생산과정에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다. 개발 초기에 형상에 집중했던 여성의 섹스토이도 만족감 제공 기능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개발되는 추세다. 도구를 사용해서 성적 만족감을 추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반드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어야만 사용자 경험이 최적화되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정치권: 정치권에서 리얼돌 규제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작게는 리얼돌 판매사 웹사이트 성인인증 절차에서부터 크게는 리얼돌에 대한 "심층적 논의와 기준" 마련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1월 초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아동ㆍ청소년을 형상화한 리얼돌을 막기 위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판매자: 판매업체들은 리얼돌을 쉽게 실제 여성과 구분 가능한 성기구로 보고 있다. 사용자들은 사생활에 대한 권리가 있으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장이 작동한다는 논리를 옹호한다.
여성계: 여성계는 리얼돌을 '섹스돌'이라 부르며 여성 신체에 대한 대상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욕구 정당화, 그릇된 성관념의 고착화 등의 이유를 들어 반발해왔다. 2019년 9월과 11월에는 여성 수백명이 서울에서 리얼돌 금지 요구 시위를 벌였다.
남성형 리얼돌을 판매하는 해외 제조사도 있다. 모든 여성이 신체적인 욕구보다 감정적 욕망을 우선시한다는 믿음은 사실이 아니다. 성적 만족감을 위해 남성형 리얼돌을 구매하는 여성들도 있다. 바이스(Vice)의 영상은 사회적으로 억압돼 온 여성의 성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한 가지의 대안으로 리얼돌을 조명한다. 남성 리얼돌의 경우 주름, 주근깨, 털 등의 신체 디테일이 더욱 세밀하게 마감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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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1월. 여성단체 리얼돌 반대 시위: 서울 도심에서 수백명의 여성들이 모여 여성형 리얼돌 금지를 요구하며 9월과 11월 두 차례 시위를 벌였다.
2019년 10월18일. 국정감사장에 등장한 리얼돌: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종합국정감사장에 여성형 리얼돌이 등장했다. 당시 무소속 이용주 의원은 "산업 진흥측면에서도 정부가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리얼돌 산업 육성을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여론의 반발에 이용주 의원은 결국 사과문을 발표했다.
2020년 7월. FC서울 리얼돌 논란: 코로나19로 인해 무관중으로 진행된 경기의 관중석을 채우기 위해 FC서울 측이 주문한 마네킹 중 일부가 리얼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K리그의 명예 실추 및 팬들에게 모욕감 및 상처'를 이유로 제재금 1억원의 중징계를 내렸다.
2020년 12월1일. 리얼돌과의 결혼?: 한 카자흐스탄 남성이 '마고'라는 이름의 리얼돌과의 결혼식을 치뤄 화제가 됐다. 한국 법제도 하에서 리얼돌은 법적으로 하나의 물건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혼도 할 수 없고 유산도 물려줄 수 없다.
해외의 경우, 미국, 영국, 그리고 호주에서 아동 형상의 리얼돌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된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