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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미얀마의 봄

쿠데타로 인한 민주주의 퇴행과 과열되는 시위 진압
3/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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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의 노트

간혹 국제사회로 눈을 돌려 끊임없이 벌어지는 여전한 분쟁들을 보노라면 지금이 2021년 맞나,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미얀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앞으로 어떤 파장으로 이어질까요? 부디 무고한 희생이 멈추고 하루빨리 미얀마에 평화가 찾아오길 기원합니다.

👀 한눈에 보기

2021년 2월1일 미얀마(버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아웅산 수치(수지) 국가고문과 원 민 대통령을 연금하고 집권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DL)의 주요 인사 수백명을 체포했다. 명목은 작년 11월 치러진 선거에 대한 부정 의혹이었다. 정권을 쥔 민 아응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국경을 봉쇄하며 1년간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에 미얀마 국민들은 열렬한 평화 시위로 수치 고문 석방과 군부 정권 퇴진을 요구하고 있으나, 군부의 강경 진압은 급기야 유혈 사태를 빚었다.

똑똑! 아웅산 수치는 자신의 이름을 '수치'가 아닌 수지로, 미얀마를 '버마'로 표기해달라고 요청한 적 있어요. '미얀마'는 군부 독재 기간 지어진 이름이지만 국제사회에서 UN의 승인을 받은 터라 병기 또는 혼용해요.

🔥 왜 중요한가?

퇴행한 미얀마의 민주주의

미얀마는 2015년 수지 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53년 동안 군부 지배를 받은 아픈 역사가 있다. 그러나 이번 쿠데타로 미얀마의 정권은 다시 군부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5년 만에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 아웅산 수치의 상징성: 미얀마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에는 늘 그녀가 있었을 만큼 수치가 자국 내에서 갖는 입지는 크다. 군부에 대한 투쟁으로 약 15년 동안 연금 생활을 했으며,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에도 가택 연금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투쟁은 2015년 NDL을 이끌고 문민정부를 세우며 빛을 보는 듯했으나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을 두둔하며 명예와 입지에 손상을 입었다.

불안했던 미얀마의 민주주의

(쿠데타는) 시간 문제였다.  ―양곤시 정책 싱크탱크 책임자 우힌 자우 윈

군부의 쿠데타는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 군부는 쿠데타 이전에도 선거 조작 의혹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5일 전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특정 상황에서 헌법이 폐지될 수도 있다"라는 말로 엄포를 놓았다.

불안한 미얀마 민주주의의 뿌리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미얀마는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생긴 국가다. 그렇기에 군부의 입김과 영향력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미얀마는 의회 의석의 4분의 1을 군부가 지명한다. 또한 미얀마 군부는 단순 사조직이 아니라 독립군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척결 대상으로만 바라보기 어렵다.

이러한 특수성 아래 짧은 기간 동안 문민정부가 권력 기반을 다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군부 의석 축소 개헌안, 수치처럼 외국 국적 배우자를 가진 이도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하는 헌법 개정안 등을 발의해왔으나 군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큰 그림
청사진

미얀마 군부의 생각

정당한 정권에 권력을 넘기겠다?: 미얀마 군부는 비상사태가 끝나는 1년 후 총선을 실시해 권력을 올바르게 이양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신뢰하는 이는 적다. 쿠데타의 명목으로 제기했던 부정선거 의혹도 선관위 측은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공포로 다스린다: 연일 시위와 항쟁이 이어지고 있는 현재 미얀마 군부는 강압적인 국민 장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군에 반항하는 국민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하고 수위를 올리는 등 '공포정치'를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정권 연장의 꿍꿍이: 1년의 '비상기간' 동안 모종의 조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미얀마에서 NLD가 선거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모습을 볼 때, 선거 시스템을 바꾸거나 단일 정당의 의회 석권을 어렵게 할 것으로 추측된다.

수치의 앞날

의심쩍은 구금 연장: 아웅산 수치 고문은 여전히 구금 상태다. 쿠데타가 일어난 1일부터 가택연금된 수치는 본래 17일 풀려날 예정이었으나 이를 하루 앞둔 16일 추가 기소됐다. 혐의는 '코로나19 방역조치 위반'이다. 사실상 구금을 연장하기 위한 억지 구실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수치 여사 풀어줘: 이에 미얀마 국민들의 분노도 거세졌다. 군부의 강경 진압에 다소 위축됐던 시위의 열기가 17일 다시 거세졌다. 국제사회 역시 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과 윈 민 대통령 등 정부요인들의 자의적 구금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라는 입장을 표명한 이래로 수치 여사의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임팩트

어두운 터널 지나는 미얀마

민주주의 회복이 먼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현재 미얀마가 겪고 있는 상황은 매우 어둡다.

미얀마 셧다운: 미얀마 군부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한 1일 국경이 봉쇄되며 모든 공항이 폐쇄됐다. 4일에는 페이스북, 5일에는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접속을 차단했다. 이후에는 며칠 연속 인터넷을 차단했다. 주요 도시에 군 병력이 대거 배치된 것은 물론 15일 양곤 시내에는 장갑차까지 나타났다.

업무 마비: 쿠데타에 저항하고 군부 정권을 위해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노동자들의 총파업도 결행됐다. 이에 공무원까지 동참하고 있어 마비되거나 지연되는 업무가 발생하고 있다.

외국자본 철수: 불안정한 미얀마 정세를 걱정하거나 군부와의 파트너십을 끊기 위한 이유로 사업 중단·철수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이는 증시에도 반영돼 미안먀 관련 종목들은 매도세를 보이고 있다.

경찰 총격에 숨진 미야 트웨 트웨 카잉을 기리는 꽃과 깃발, 초상화. ⓒYe Aung Thu

평화 시위, 사망자 발생

10만명의 용기: 시민들은 쿠데타가 일어난 지 5일 뒤인 2월6일부터 시위에 나섰다. 군부의 총칼에 많은 목숨이 희생된 사프란 혁명이 불과 2007년 일이었음에도, 7일 양곤시에서 시위에 나선 시민의 수는 약 10만명이었다.

우리는 평화로써 쟁취한다: 시위는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수치와 NLD를 상징하는 붉은색의 장미꽃을 경찰 가슴에 달아주는가 하면 냄비를 두드리는 것으로 군부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미얀마 군부 탄압을 세계에 알리고자 도로와 지붕에 큰 문구를 적거나 SNS를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움직임으로까지 나아갔다.

사망자 발생: 그러나 군부의 강경진압은 기어이 사망자를 냈다.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중태에 빠졌던 시위 참가자가 2월19일 사망했다. 하루 뒤인 2월20일 만달레이에서는 2명의 사망자와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미얀마를 둘러싼 국제사회 움직임

국제사회 대부분은 미얀마 군부에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국제기구를 통하거나 독자적으로 제재 계획 역시 밝히고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12일 미얀마 쿠데타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47개 이사국은 기존 정부 복구, 쿠데타로 인해 구금된 모든 사람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데 합의했다. 결의안을 제출한 유럽연합(EU) 측은 군부 인사나 군부 소유 사업체를 겨냥한 독자적인 추가 제재도 예고했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쿠데타가 일어난 1일 "민주주의 전환과 법치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라며 즉각 비판 성명을 낸 바 있다. 이후 추가 성명을 발표해 수출통제를 비롯해 군부 인사나 군부와 연계된 MEHL 등의 대기업 등에 대한 제재를 예고했다. 미얀마에 연간 2조원가량 경제지원을 해오던 일본 정부 역시 이를 중단하거나 축소할 것을 검토 중이다.

살짝 거리 둔 미얀마 군부의 우방: 미얀마 군부와 긴밀한 중국과 러시아만이 쿠데타 발발 후 '내정 문제'라고 표현하며 적극적인 입장 표명을 피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은 17일 미얀마 주재 중국 대사를 통해 "현 상황은 중국도 절대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중국이 미얀마 군부의 '뒷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신경쓴 모양새다.

미·중 사이 영향력 싸움?: 미국은 미얀마가 문민정부 정권일 때 제재의 대부분을 해제하며 우호를 표명한 바 있다. 당시 미얀마도 기존 일방적인 친중국 노선을 수정했다. 민주주의의 영향력을 높이고 싶은 미국과 기존 군부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문민정부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셈이다.

그러나 미얀마의 전통적인 우방은 중국이다. 중국은 '일대일로'로 불리는 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으로 미얀마와 교류하고 있다. 또한 농산물을 주축으로 한 미얀마 수출의 30%는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이번 사태가 결국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 줄다리기로 흐를 가능성을 점치는 분석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미국보다 투자액에서 10배 넘게 앞서는 중국의 영향력이 우세할 거라는 전망이다.

스탯
평화 시위 vs 강경 진압, 미얀마 대치 상황 타임라인

미얀마 국민의 분노: 미얀마는 국민의 86%가 불교신자인 불교국가다. 평생 동안 선과 정의를 지키라는 부처의 가르침 '담마'(Dhamma)를 삶에서 중요하게 여긴다. 국민이 지지한 수치 고문과 문민정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시민에게 총칼을 들이댄 군부의 행태에 담마는 없다고 보고 있다.

걱정거리
이해관계

미얀마 국민: 군부의 강경 진압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힘을 모아 평화시위를 고수하며 군부에 대항해왔지만, 군부의 폭압은 계속돼 사망자까지 나왔다. 이에 슬픔과 분노가 극에 달하고 있으며 문제 해결에 국제사회의 개입 역시 간절히 바라고 있다.

미얀마 군부: 강력한 처벌과 진압으로 국민들을 통제하는 모양새지만 불안을 느끼고 있다. 사망자 발생으로 가뜩이나 안 좋던 국제사회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으며, 미얀마 국민들의 분노 역시 일촉즉발의 상태다.

국제사회: 쿠데타 발발 이후 군부에 대해 규탄과 제재의 목소리를 높였던 국제사회의 분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프랑스 및 영국 외무부도 "용납할 수 없다" "선을 넘은 것"이라며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미국: 미얀마 군부에 대한 비판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 미얀마 내 중국 입김에 대한 견제는 물론 국제사회 내 민주주의 유지에 힘쓰는 모양새다. 시위 참가자 사상 사태에도 "버마 시민들의 편"임을 강조하며 군부를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중국: 미얀마 군부의 전통적인 우방인 중국의 입장은 다소 난처해졌다. 이번 미얀마 사태에 대해 '우리도 원치 않는 일'이라고 입장을 표명한 바 있으나 사망자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데타 발발 당시 유엔 안보리의 쿠데타 규탄 성명에도 반대했던 만큼 직접적 행동에 나설 확률은 적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과 군부독재라는 유사한 근대사를 겪은 만큼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공감도 높은 편이다. 국내 거주 미얀마 단체들이 민주화 지지 집회에 나서는 한편 우리나라 국민들도 온·오프라인상으로 응원을 보내고 있다.

진실의 방
미얀마 군부는 왜 지금 쿠테타를 일으켰을까

반세기 동안 미얀마를 지배했던 군부는 지난 5년간 문민정부와 '불안한 동거'를 하며 입지가 축소돼 왔다. 더구나 지난해 11월 치러진 총선에서 NLD가 전체 의석의 83%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재차 정권에 들어서자 군부의 위기감은 극에 달하고 만다. 계속되는 영향력 축소는 물론 헌법개정도 걱정됐을 것이다.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2월1일은 11월 총선 이후 의회 개원 첫날이었다. 문민정부 2기가 출범하는 날 쿠데타를 결행한 셈이다.

말말말
일기예보
타임머신
미얀마의 꽃 피어나다, 8888항쟁
1991년 시위자들 앞에서 연설 중인 아웅산 수치 ⓒNew York Times

아웅산 수치는 1988년 8월8일 미얀마에서 발발한 이른바 '8888항쟁'으로 민주화의 길에 뛰어들었다. 8888항쟁은 네 윈 군부정권의 경제 국유화, 통용지폐 회수 정책에 반발해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다. 이전까지 평범하게 살던 수치는 군부의 강경진압으로 평화시위에 나선 시민 수천명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조국의 민주화에 투신하기로 마음 먹었다. 민중 역시 미얀마 독립의 주역인 아웅산 장군의 피를 이은 그녀가 나서 군부를 꾸짖고 미얀마에 잃어버린 민주화의 봄을 가져다 주기를 염원했다. 결국 수치는 대중 앞에 나섰고, 항쟁 발발 일주일 후인 8월15일 군부에 미얀마 국민 요구에 응할 것을 요구하는 화평안을 제안했다. 희생자 시신이 안치된 양곤 종합병원에서 민주화 연설을 펼친 수치 앞에는 수십만 미얀마 국민이 운집했다. 1988년 9월18일 당시 군부의 지배자인 네윈 장군이 퇴진하며 항쟁은 끝을 맺지만, 또 다른 군부가 들어서 26년 더 정권을 연장한다.

먼나라 이웃나라
1980년 얼어붙은 '서울의 봄'

민주주의의 역사가 길지 않은 우리나라도 미얀마처럼 기다긴 독재의 시기를 보낸 적 있다. 그중에서도 이번 미얀마 사태와 가장 유사하다고 거론되는 시기는 바로 1980년 5월, 이른바 차갑게 얼어붙었던 '서울의 봄'이다. 1979년 10월26일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유신 헌법을 제정해 장기 집권을 노리던 박정희가 피살되고, 이후 1979년 12월21일 최규하 정부가 출범하자 국민들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러나 실상 권력을 쥐고 있던 것은 같은 해 12.12 군사반란으로 군부를 장악한 하나회 소속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을 필두로 한 군부는 마침내 1980년 5월17일 쿠데타를 일으키고 계엄령을 선포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빼앗긴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열망은 5.18 민주항쟁으로 나타난다. 당시 군부의 군사진압으로 희생된 사망자 수는 약 600명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