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후반에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된 대표적인 항일단체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3•1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 운동 이후, 일본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조선의 통치방식을 바꾸게 되었죠.
이에 민족주의 진영은 일본의 지원으로 근대화를 이루자는 ‘자치론’ (일본 안에서 자치하자는 주장, 타협적 민족주의, 일본에 타협하는 세력)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으로 나뉘게 됩니다.
한편, 1917년 러시아의 소비에트(노동자, 군인)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자, 국내에서도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커집니다. 이에 사회주의 진영 안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협력의 필요성을 논의하게 되었죠.
마침 1920년을 기점으로 일제가 조선인 단체 설립을 허락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27년 국내 최초의 민족운동 통일 단체이자 합법적 단체인 신간회가 설립되었어요.
신간회는 언론, 기독교, 천도교, 불교, 공산당의 대표들이 조직했어요. 정치적 / 경제적 각성을 촉진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며, 기회주의를 일체 배격한다는 강령을 내세웠어요.
또한 일본의 착취 기관을 철폐하고, 일본인의 조선 이민 반대, 한국인의 민족 교육과 한국어 교육 시행, 1920년대부터 활발해진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를 지원하였어요.
1929년 10월 전라도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과 광주지역 학생의 싸움이 항일 민족 운동으로 발전한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날 당시에는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의해 지도부가 구속되었어요.
이후 집권한 지도부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자 사회주의자 위주로 구성된 지방 지회에서 반발하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민족주의자에 대한 비판 여론까지 거세지며 신간회 활동이 정지되었어요.
결국 사회주의자들 대부분이 신간회에서 이탈하였고, 1931년 신간회는 해소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