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 외교

명과 후금 사이의 어느 편도 들지 않겠다!

사전적 정의

조선 광해군 재위 당시 명이 쇠약해지고 후금이 강성해지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살피면서 신중하게 대처하고자 했던 외교 방식

쉬운 설명

POINT 1📌

1592년 임진년에 일본의 침입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전쟁 중에 명나라(중국의 한족이 세운 나라)가 조선을 도와주면서 명나라, 조선, 일본의 전쟁이 됩니다.

이후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이 물러나게 되면서 전쟁은 끝납니다. 하지만 이 전쟁으로 명, 조선, 일본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POINT 2📌

명나라가 있는 중국 지역은 예로부터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등 다양한 민족이 세력을 다투는 곳이었습니다.

17세기 들어 임진왜란에 이어 나라 안 정치의 혼란으로 명나라는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틈을 이용해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중원지역(중국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에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도움을 준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하였고, 이때 조선의 왕인 광해군은 강홍립 군대를 보내기로 합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 훈련을 하는 등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국토의 3분의 1 이상이 황폐해진 상황에서 광해군은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조선의 병력을 모두 지원하기는 힘들다는 판단에 후금과 적극적으로 전쟁을 피하고, 적절한 시기에 항복하는 ‘중립 외교’를 선택합니다.

POINT 3📌

중립 외교는 어느 나라의 편(입장)에 서지 않고, 중간 입장을 지키는 정책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등거리(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등거리 외교라고도 합니다.

광해군은 도원수(전쟁 시 군을 통솔하는 장군) 강홍립에게 명과 후금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합니다.

결국 후금과 명나라의 전쟁에서 명나라가 패배하였고,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어요. 이러한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은 당시 명나라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사대부들의 비난을 받았고, 이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왕의 자리에서 쫓겨남)되는 계기가 됩니다.

POINT 4📌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불리한 상황과 급성장한 후금의 눈을 피하는 실제 현실에 도움이 되는, 실리적인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사대 정책으로 명을 떠받들던 당시 사회에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쓴 큰 외교적 결단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외교정책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 꼭 기억하도록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