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

먹을 것에 장난을 치다니. 일본을 몰아내자!

사전적 정의

1882년(고종 19) 6월 9일 훈국병(訓局兵)들의 군료분쟁(軍料紛爭)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

쉬운 설명

POINT 1📌

1863년부터 시작된 흥선대원군의 섭정(국왕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10년 후인 1973년에 끝나고, 고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서 조선의 상황은 변하게 돼요.

가장 큰 변화는 1876년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 것이에요. 이 조약으로 부산, 인천, 원산의 항구를 개항하였고, 일본과 교류를 맺는 개화 정책이 활발해졌어요.

또한, 개화 정책 중 하나로 일본식 군사 제도를 받아들여 원래 있던 훈련도감, 5군영을 줄이고, 일본인 교관에게 교육 받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새롭게 만들었어요.

별기군에 비해 구식 군대는 차별을 받았고, 생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부업(상업, 수공업자로 일함)도 일본 상인에 의해 어려워졌어요.

POINT 2📌

1882년, 나라에서 구식 군인들의 밀린 월급 중 1달분을 쌀로 주었는데, 쌀 안에 모래가 섞여 있었고, 이에 화가 난 군인들은 선혜청(대동법으로 걷은 쌀 등을 관리하는 곳)을 급습했어요. 또한 일본 공사관을 포위하고, 높은 관리들을 처형하였어요.

이 사건을 1882년 임오년에 일어난 군인들의 반란이라는 뜻의 ‘임오군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 군인들과 빈민(가난한 백성)들은 고종과 민씨 대신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하면 상황이 나아질 거로 생각했어요. 이러한 구식 군인들의 요구를 알게 된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불러들였고, 군인들도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바로 해산되었죠.

다시 돌아온 흥선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이라는 정책 추진 기구와 별기군을 폐지했어요.

그러나, 이때를 틈타 청나라(지금의 중국 땅에 있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가 민씨 세력의 부탁을 받고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반란의 책임을 물어 흥선대원군 마저 청나라로 데려갔어요.

이때부터 청이 조선의 정치와 경제에 깊이 간섭하기 시작했어요.

POINT 3📌

임오군란이 진압된 이후,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어 배상금을 지불하였고, 일본 공사관을 일본 경비병이 보호할 수 있도록 했어요.

청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조약을 맺어 청나라의 특권을 인정했어요.

임오군란은 단순히 구식 군인들의 반란이 아닌,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싶은 청나라와 일본의 대립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어요.

특히 두 나라와 맺은 조약으로 정치, 경제 침투가 더 심해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