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년 (순조 11) 평안북도에서 홍경래가 지방 차별과 조정의 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농민 항쟁
조선시대 영조와 정조 시기를 지난 후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세도 정치 시기라고 합니다. 왕권은 약했고 서울(한양)이 중심이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서북 지역이었던 평안도(현재 북한)는 예로부터 청나라와 가장 가까워 무역을 주도했던 아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남부지역에 비해 성리학과 사족(士族) 중심의 문화와 향촌질서가 성숙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이유였죠.
실제로, 청나라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접대비와 군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보관한 곡식을 정부가 가져가고, 상공업자의 활동도 억압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자, 당시 몰락 양반이었던 홍경래는 서얼, 금광 경영인, 농민 계층을 한데 모아 봉기를 일으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청나라와의 무역과 금광 개발 등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은 군사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주었고, 농민은 열심히 군사 훈련을 받았죠.
이렇게 홍경래가 이끄는 봉기군은 1811년 평안도 지역에서 처음으로 봉기를 일으키며 차근차근 청천강 이북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봉기는 약 5개월간 계속되었지만, 뚜렷한 개혁 방향이 없었던 탓에 결국 정부군에게 진압되었습니다.
농민 봉기의 성격이 강했던 홍경래의 난은 농민들이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정부에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많은 농민이 뜻을 모을 수 있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1862년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을 중심으로 하는 임술 농민 봉기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